
목마를 탄 소녀
문영강태
By. @volvonotokay
어스름한 저녁 노을이 서서히 푸르스름하게 바뀌면서, 햇빛이 들어오던 캠핑카의 창은 이제 창문보다 거울의 역할을 하는 듯했다. 강태는 창에 비친 문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아래에 있는 강태의 양 어깨에 턱 하니 두 다리를 얹어 놓은 문영의 모양새가 꽤 우스웠다. 꼭, 목마 탄 것 같네. 강태는 문영의 발바닥을 간질일까 하다가, 그리 무겁지 않은 무게에 가느다란 다리를 꾹 붙드는 것으로 장난을 대신했다. 덕분에 다정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 있다는 것을 문영은 쉽게 알아차렸다.
"문영아."
"그렇게 말해도 다리 안 뺄 거야. 마사지나 좀 해 줘. 오늘 많이 걸었어."
"어련하시겠어."
손바닥으로 문영의 종아리를 문질러 주며 하루의 여운을 곱씹던 강태는, 상태의 부재가 생각보다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형이 새로 시작했다던 동화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강태는 그동안 잊고 있던 질문 하나가 생각나 말문을 떼려던 참이었다.
"문강태, 집중 안 할래?"
귀신이네.
"형 생각하고 있었어. 있잖아 고문영, 질문 하나만 해도 돼?"
"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면 사절이야. 상태 오빠랑은 조금 이따 또 통화할 거잖아."
"정확히는 고문영의 동화에 대한 질문인데."
"그건 고문영이 아니라 일 얘기잖아. 내가 동화작가라는 사실을 잊었어?"
"되게 깐깐하시네. 고문영의 동화는 고문영의 일부로 쳐주지 않는 거야?"
"당연하지. 그건 짭 고문영이야. 실물인 내가 백만 배는 더 예쁘다구. 뭐 그래서, 하고싶은 질문이 먼데?"
"네 동화 중에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 있거든. 네 목소리로 읽어주면 진짜 좋을 것 같아서."
"질문이 아니라 부탁이잖아, 그건."
"어쨌든."
어쭈, 이제 막 얼렁뚱땅 넘어갈 줄도 알고. 문영은 피식 웃고서 강태의 머리 위로 턱을 얹은 채 웅얼거렸다. 문강태, 고문영 팬 다 됐네. 처음엔 동화 안 읽는다더니. 무슨 책인데?
"꼭 지금 이 자세같네."
"응?"
"목마를 탄 소녀."
❈ ❈ ❈
소녀는 오늘도 같은 꿈을 꾸었어요.
커다란 저택에 사는 예쁜 공주가 되어, 활짝 핀 꽃들을 내려다보는 꿈이었죠.
어린 문영은 생각했다. 공주라는 건 대체 어떤 존재일까.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주는 엄마의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문영은 한 번도 그 손에서 따스함을 느끼지 못했다. 공주님이라고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허공만 맴도는 듯했으나, 문영은 그 작디작은 사랑조차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문영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공주로 상상하며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게 전부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꿈이었지만, 소녀는 전혀 기쁘지 않았어요.
하루가 다르게 화려해지는 꽃들을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나 언제 도착할 지 모르는 왕자님을 기다리기만 하는 공주님 역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하루이틀이 전부였다. 공주님으로서의 고문영은, 발코니 앞에 걸터앉아 견고한 성처럼 절대 열리지 않는 철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향기 없는 꽃으로 착각한 채 가끔 2층으로 날아드는 나비를 열심히 구경하는 것이 그나마 문영에게 소소한 재밋거리였다. 곱게 펼친 날개를 팔랑거리다 어느새 날아가는 나비들. 문영은 생각했다. 만약 공주는 성 안에만 갇혀있어야 한다면, 공주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마녀는 공주보다 재밌는 역할이 아닌가? 순간 날아드는 검정색 나비를 바라보던 문영은 손을 뻗어 마녀의 날개를 잡아챘다. 오지 않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왕자를 찾아나서는 마녀가 더 재밌을 것 같아.
그렇게 찢어진 날개를 제 등에 붙인 공주는, 이제 공주가 아니라 예쁜 마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은빛 보름날, 멀리서 키가 아주 큰 피에로가 소녀에게 다가왔어요.
소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너는 내가 찾던 왕자님이니?'
'운명을 믿어요?'
웃으며 건넨 말 속에는 뾰족한 칼날이 들어 있었다. 운명을 믿느냐는 물음에는 운명을 믿고자 하는 소녀의 소망도 있었으며, 운명을 부수고 싶은 마녀의 바람도 녹아들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이었다. 우연이었으며, 운명보다는 악연에 가까웠다. 소년의 말처럼. 그러나 문영은 은빛으로 반짝이던 소년과의 첫 눈맞춤을 잊지 않았다. 반복되던 매일의 악몽 속에서 나타났던 키 큰 사내와 꼭 같은 눈빛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 문영은 이 남자의 웃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어요.
'네가 원하는 게 그거면, 왕자가 되어줄게. 왕자님을 찾는 게 네 소원이야?'
오늘따라 더 반짝이는 듯한 하늘과 화려하게 흩어지는 꽃잎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키 큰 광대를 바라본 소녀는,
예쁘다. 갖고 싶어. 화창한 봄날에 마주했던 문강태에 대한 첫 감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갖고 싶다는 마음 대신 알 수 없이 간질이는 감정들이 가슴에서 차오르는 듯했으나, 문영이 그 사실을 눈치채기까지는 한참이 걸린 후였다. 더 이상 잔잔하게 떨어지는 벚꽃잎이 아닌, 뚝 떨어지는 목련처럼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공주 대신 예쁜 마녀로 스스로를 정의하며 살아왔던 이십 여 년의 시간 안에는 아직 운명을 기다리는 소녀가 깊숙하게 자리해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피에로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아니. 대신 목마를 태워줘.'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아 먼지가 쌓인 철문이 열린 것도 처음이었고, 거미줄이 친 저주받은 성의 대문까지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들어온 손님도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 다가와 문영의 손에 꽃다발을 쥐어준 문강태라는 존재는, 너무도 거대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어린 소녀의 구원자라고 믿고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더 이상 두 다리를 쓰지 못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바깥은 네 생각만큼 멋진 모습이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소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어요.
'난 이 성 밖으로 나가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야.'
진실을 모르는 게 때로는 더 편할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한 피에로는 소녀가 내민 손을 힘주어 잡았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어서 올라와.
❈ ❈ ❈
"...달 예쁘다."
"......어?"
"보름달이라구."
잔잔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눈을 감고 문영의 동화를 감상하던 강태였다. 잠깐의 침묵 후 들리는 말에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밖을 내다보니, 빨갛게 내려가던 노을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커다란 보름달이 산 중턱에 걸려 있었다. 햇빛이 그림을 그리던 하얀 이불도 어느새 은빛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동화와 잘 어울리는 나긋한 저음이 끊겨버린 게 못내 아쉬워, 강태는 고개를 돌려 문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목마를 탄 소녀는 어떻게 되는데?"
"안 알려줘. 그러니까 돈 주고 사, 문강태. 상태오빠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책은, 돈 주고 보는 거야.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치사하긴."
그래도, 달은 예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태는 목마를 탄 소녀의 해피엔딩을 빌었다. 고문영의 동화 속 악몽의 꾸러미들이 더 이상 소녀를 괴롭히지 않도록. 이제 더 이상 문영의 날카로운 펜 끝이 잔혹한 결말을 써내려가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강태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마를 탄 소녀의 결말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과거를 이겨내고 현재를 사는 서로에게 더 이상 악몽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목마를 탄 소녀와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은 더 이상 다리를 잃지 않아도, 과거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온기가 필요했던 좀비아이들은 그림자 엄마보다 훨씬 따뜻한 서로의 품이 있었으며, 이제 깡통 공주와 가면 왕자에게는 진실에도 도망가지 않을 단단한 날개가 달렸고 과거를 이겨내 준 박스 아저씨가 곁에 있었다.
"문영아. 달이 참 밝다, 그렇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고백은 금세 말랑하게 닿아오는 살결에 먹혔지만, 예쁘게 피어난 벚꽃처럼 시작었던 또 다른 동화는 이제 꾹 닫힌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젠 진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문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치는 입술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