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ONDERLAND
문영강태
w.노브레이크
“우와... 진짜 멋있다!”
밀라노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밀라노대성당. 대성당을 보기 위해 모인 세계 각국의 사람들 중 강태가 있다. 강태는 목을 한껏 꺾어 대성당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설렘을 숨길 길이 없다. 인생 첫 유럽여행이었다. 밀라노는 한 달짜리 유럽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첫 도시.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풍경들은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 들인 그간의 모든 노력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그냥 흘려 보낼 수 없지! 헤실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든 강태가 카메라를 켜는 순간,
“Hey, let me help you take a photo! (이봐요, 사진 찍는 거 내가 도와줄게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셀카로는 성당이 사진에 채 안 담길 것 같아 아쉬워하던 찰나였는데, 아주 반가운 도움의 손길이었다. 강태가 땡큐, 땡큐 하며 남자에게 핸드폰을 건넨다. 핸드폰을 받아든 남자가 강태에게 손바닥을 펴보라는 시늉을 하더니 그 위에 노란색 옥수수 과자를 잔뜩 쏟았다. 피죤, 피죤! 피죤 컴 앤 아이 태이크 유어 포토! 오케이?
당황스러워 하는 강태에도 아랑곳 않고 남자가 공중으로 던지라 소리쳤다. 그 말에 강태가 어버버 과자를 허공에 뿌린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비둘기들이 날아들었다. 남자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고, (예견돼 있었지만 그래도 심적으로는) 난데없는 비둘기 어택에 놀란 심장을 다독이는 강태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이스 포토, 나이스 포토! 유 아 베리 핸섬!
남자의 호언장담대로 사진은 제법 근사했다. 밀라노대성당 앞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태어나 처음 해본 경험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강태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데, 남자가 대뜸 손을 내민다. 음...? 하이파이브? 강태가 그 손바닥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얼굴 가득하던 미소를 싹 지운 남자가 외쳤다. 잇츠 텐 유로! 기브 미 텐 유로, 보이!
강태의 버킷리스트 1번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쭉 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그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제대 후 복학도 미룬 채 1년 간 미친 듯이 돈을 모았다. 졸업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밀라노 한복판에 서 있으니 후회는 없다...만! 인생 첫 유럽여행의 첫 도시인 밀라노에서의 첫 날, 관광 나오자마자 삥을 뜯기다니...
인생샷 사기꾼이 뚝딱 빼앗아간 10유로를 생각하며 밀라노대성당 근처 벤치에 허망하게 앉아 있던 강태가 이내 고개를 탈탈 턴다. 첫 시작이 조금 삐끗했지만, 액땜했다 치자. 삥 좀 뜯겼다고 인생 첫 유럽여행을 우울하게 시작할 순 없는 노릇. 구글 맵을 길잡이 삼아 강태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긴다. 좋아, 가려고 했던 곳 다 가는 거야! 밀라노대성당은... 약간 빈정 상했으니까 그냥 패스!
“어흐... 다리 아프다...”
바닥에 가방을 툭 내려놓은 강태가 호스텔 침대 위에 시체처럼 늘어진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터질 것 같다. 내일 근육통으로 못 일어나는 거 아냐? 슬쩍 걱정이 됐지만 후회는 없다.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피자 가게에서 얼굴보다 (훨씬) 큰 피자를 우걱우걱 먹고, 한 손에 젤라또를 들고서 낡은 벽돌 깔린 골목골목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밀라노의 패션 피플들도 구경하고...
인생 첫 유럽여행 첫 도시 밀라노에서의 첫 날을 매우 알차게 보냈다. 찍은 사진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쭉쭉 넘겨보던 강태의 눈이 스멀스멀 감기기 시작한다. 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되는데... 너무 졸립다... 그냥 이대로 자버릴...
“순 없어!”
강태가 몸을 벌떡 일으킨다. 유럽에서의 첫날 밤을 잠으로 보내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순식간에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강태가 인터넷 검색 창을 켠다. 뭘 검색해야 하나, 잠깐 고민한다. 허공만 맴돌던 엄지가 이내 핸드폰 액정에 내려앉는다. 빠르게 이리저리 춤춘다.
Hottest Bar in Milan. 밀라노에서 가장 핫한 바. 스크롤을 내리며 신중하게 포스팅들을 훑어보던 강태가 이내 씩 웃는다.
좋아, 여기로 결정했어! 밀라노에서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아 보겠어!
* * *
마치 중세 시대의 그것처럼 두껍고 무거운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면 세로로 긴 형태의, 멋들어진 공간이 펼쳐진다. 전체적인 조도는 낮지만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진 조명 덕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덴 어려움이 없다. 세련된 음악은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볼륨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거울로 된 왼쪽 벽을 따라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들이 쭈욱 놓여있고, 반대편인 오른쪽에는 아주 긴 바가 놓여 있다. 검은 대리석 바 위엔 각양각색의 술이 담긴 잔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바 앞에 놓인 키 큰 스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바텐더와 말을 섞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향해 웃기도 한다.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바라는 명성에 맞게 소파 자리며 바 자리며 빈 곳 없이 사람들이 가득하고, 강태도 그 중 하나...인가?
‘휴... 괜히 왔나...’
바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엔 입장을 기다리는 팀이 몇 있었다. 강태는 혼자라 바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1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입구 옆자리. 문이 여닫힐 때마다 바깥바람이 불어오고, 바텐더든 누구든 관심 하나 두지 않는.
하... 내 이름의 문은 사실 문간 문(門)이었던 걸까? 이름 때문에 밀라노에 와서도 결국 문간에나 앉는 신세가 된 걸까? 강태가 시무룩한 얼굴로 연두색 올리브 하나를 입에 넣는다. 시큼텁텁한 맛에 눈꼬리가 바르르. 목구멍 뒤로 꿀꺽 삼키곤 넓디넓은 바 안쪽을 힐끗 쳐다봤다.
멋있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얼핏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시계며 가방이며 신발이 잔뜩. 강태가 괜히 제 옷자락을 탁탁 턴다. 가지고 온 옷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것으로 골라 입었지만 저들에 비하니 자신은 그저 지나가는 행인3 같다.
이렇게 세련되고 화려한 곳에 오는 건 애초 계획에 없었기에 기본 티셔츠에 청바지, 편하게 걸칠 체크남방만 주구장창 챙겨온 탓이다. 다행히 문전박대 당하진 않았으나, 이대론 밀라노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긴 개뿔, 말 거는 이 하나 없어 입에 거미줄로 수를 놓게 생겼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강태가 칵테일이나 홀짝인다. 그나마도 미스 초이스로 영 맛이 없다. 호스텔에서 여기까지 올 때만 해도 근사하고 글로벌한 밤을 보내는 스스로를 상상했는데... 하, 술이 쓰다...
강태는 자신만 빼고 하하호호 즐겁기만 한 사람들을 안주 삼아 남은 칵테일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더 있어봐야 시간 낭비일 게 뻔하다. 그 때 여태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바텐더가 강태를 향해 만류하는 손짓을 한다.
“This is for you, sir. (이거 손님 거예요.)”
가늘고 긴 샴페인 글라스, 그 속의 빨간색과 보라색이 영롱하게 뒤섞인 칵테일. 강태가 일어난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텐더를 바라본다. 눈썹을 들썩이며 이게 뭐냐 묻자 바텐더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
잔에 담긴 칵테일에서 달콤한 향이 풍겨 나온다. 홀린 듯 자리에 다시 앉은 강태가 잔을 집어 홀짝 맛을 보았다. 와, 맛있네! 근데 나한테 이걸 왜 준 거지...? 강태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바텐더의 눈치를 살핀다.
이거, 혹시 작업인가? 밀라노에선 호모섹슈얼 아닌 사람 찾는 게 더 힘들다던데... 내가 의외로 밀라노에서 되게 먹히는 스타일일 지도 몰라.
“Ti piace il vostro cocktail? (그 칵테일 맘에 들어요?)”
어깨를 감싸 쥐는 부드러운 손길에 놀랄 틈도 없이 묵직하지만 달콤한 목소리가 강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에 가득 들어찬 건 자주색, 파란색, 빨간색 꽃이 뒤엉킨 화려한 꽃밭. 아니, 꽃밭 같은 옷의 무늬.
강태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려 목소리 주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오묘한 얼굴. 얇은 듯 하면서도 강직한 선이 작은 얼굴 위에 쭉죽 뻗어 있다. 어둑한 바 안에서도 여자의 작은 얼굴은 따로 조명이라도 받는 듯 홀로 빛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참을 뚫어져라 여자를 바라보던 강태가 이어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린다.
“Giapponese? (일본인?)”
“어... 파든 미?”
“Non sembri un cinese. Destra? (중국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매끈하고 유려한 이태리어. 강태가 세 박자 정도 늦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이 돈트 스피크 이탈리안. 쏘리. 민망한 얼굴로 양 손까지 내젓는 양을 바라보던 여자가 강태의 것과 똑같은 칵테일이 든 잔을 내밀며 말한다. 한국인이구나? 강태 역시 얼결에 자신의 잔을 들어 가볍게 맞부딪히며 되물었다.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아니, 한국인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coreano.”
여자가 잔을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내민 손을 맞잡자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힘에 강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옆자리 추워요. 내 자리로 가요.”
여자의 목소리에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강태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주친 시선에 싱긋 웃는 여자의 눈동자가 깊은 빛으로 반짝였다. 순간 눈이 부셔 강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떴다.
* * *
허리춤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실크의 촉감, 머리 뒤를 푹신하게 받치는 쿠션, 그리고 깃털처럼 몸을 쓸어내리는 손짓....
손짓?
“뭐, 뭐, 뭐하는 거예욧...?!”
번쩍 눈을 뜬 강태가 소리쳤다. 강태의 허리 위에 앉아 손을 움직이던 여자가 “굿모닝.” 하고 인사한다. 강태를 바라보는 얼굴이 해사하기만 하다.
강태는 바쁘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등 뒤로 보이는 풍경은 척 보기에도 엄청 비싸 보이는 호텔 스위트룸이고, 지금 등 대고 누워 있는 곳은 누가 뭐래도 침대고, 지금 자신은 비행기 타고 지나가며 봐도 헐벗은 상태였다.
강태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더니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다. 과부하가 걸린 듯 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긴 머리를 한 쪽 어깨 위로 쓸어 넘긴다. 그녀에게서 아까 바에서 맡았던 달콤한 칵테일 향이 났다.
“기억 안 나?”
“모..모르겠는데...”
강태가 술기운에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본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의 파편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먹어보겠냐고 물어봤잖아.”
“누가....?”
“내가.”
“뭐, 뭐를요?”
“나를.”
강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문영은 생각한다. 와우, 입 진짜 크네. 키스하면 잡아먹히는 느낌이겠다. 제 허리 위에 앉아 있는 문영이 무슨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지도 모른 채 강태는 허둥지둥 기억을 되감는다.
함께 소파 자리로 옮겨간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술이 들어갈수록 두 사람은 자주 웃었고,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으며, 매우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가 점점 느슨해져 결국 서로에게 기대 앉은 것만 같은 자세가 되었을 때, 강태가 말했다.
[엄청 알록달록해. 사탕껍질 같아.]
[사탕 껍... 아아, candy wrap! 내 옷이 candy wrap 같다고?]
[맞아요, 쫌 그래. 푸흐흐... 나 어릴 때 사탕 진짜 많이 먹었는데.]
[좋아해? 캔디.]
[지금은 잘 안 먹어요. 다 큰 어른이 사탕 물고 있음 좀 웃기잖아.]
[왜? 뭐 어때. 먹고 싶음 먹는 거지. 하고 싶음 하는 거고.]
[그런가...?]
[Ovviamente. (당연하지.)]
문영의 대답에 강태는 환하게 웃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힌 몰라도 제 맘에 꼭 드는 말일 것이다. 대화 내내 그랬다. 특별한 말이 아니어도 문영이 하는 말은 모조리 좋았다. 함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꼭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새롭고 낯설어서 끊임없이 탐험해 보고 싶어지는.
[먹어볼래?]
아주 특별한 초대장처럼 건네진 그 질문. 기꺼운 맘으로 고갤 끄덕이고 싶었는데, 일말의 양심이 강태로 하여금 되묻게 했다. 뭐를요? 문영은 더없이 달콤하게 웃으며 답했다.
[Candy.]
간밤의 기억을 헤매던 강태가 급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는다. 젠장, 젠장! 난 대체 뭐라고 대답한 거지? 먹어보겠냐는 질문에 예스를 외쳤으니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거...겠지?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타올랐다 하는 강태에 문영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숙였다. 양 손으로 강태의 얼굴을 감싼다.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한다.
“깼으니까 계속 할게?”
“뭐, 뭘?”
“섹스.”
문영이 덧붙였다. 싫으면 지금 말해. 시작한 다음에 멈추는 건 없어. 강태가 멍해진 얼굴로 문영을 올려다본다. 잠시 멀어졌던 두 입술이 다시 포개진다.
* * *
친구들의 말이 생각난다. 원나잇 한 다음날 아침엔 상대를 안 마주치는 게 제일 좋다고. 본능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 뒤엔 모른 척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강태는 진저리 치며 말했다. 아무리 하룻밤이어도 볼 일 끝났다고 어떻게 바로 돌아서냐?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만나고 쉽게 안녕 하고 그럴 수 있는 존재야? 어? 그리고, 이 새끼들아, 그 이전에 원나잇을 왜 해, 원나잇을? 사귀지도 않을 거 세...섹...그건 왜 하냐고!
어디 조선시대에서 왔냐며 친구들이 비아냥대도 강태는 한결같이 외쳤다. 나는 사랑 없는 섹스는 절대 안 해. 그게 내 신념이고 가치관이야.
“아으으...”
강태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한다. 잠이 깨자마자 밀려오는 숙취에 머리가 빙빙 돈다.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강태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뜨겁다 못해 하얗게 불타버린 간밤의 흔적이 온몸에 남아있었다.
그게 내 신념이고 가치관이야 좋아하시네! 술에 완전 쩔어서는 말 한 마디 안 통하는 이 타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밤새 이렇고 그렇고, 저, 저런 것까지 하다니...! 한 번 보고 말 사이에 당장 침대로 뛰어드는 일을 내가 할 줄이야... 지조 있는 선비처럼 지켜온 내 신념, 이젠 다 틀렸어...
“아니, 잠깐만.”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던 강태가 우뚝 멈춘다. 한 번 보고 말 사이가 아니면 되는 거 아냐? 사랑 없는 섹스가 아니게 되면 되는 거...가 맞긴 한데, 불가능하잖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지고 그런 건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에이씨, 다 틀렸어...
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강태가 어정쩡한 몸짓으로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어젯밤에 그렇게 달려놓고도 다리 사이에 아침 해가 활기차게 떴다. 현타로 울렁이는 맘을 애써 누르며 자신을 다스리는데...
“Buongiorno. (좋은 아침.)”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룸 테라스에서 방으로 들어오는 문영에게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난다. 강태는 고개만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영을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긴 머리와 샤워가운 차림. 화려했던 어제보다 더욱 아찔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바로 한 강태가 눈을 질끈 감는다. 속으로 염불처럼 외우던 애국가가 4배속으로 흐른다. 나 자신아, 제발 진정해, 제발! 힙합 경연 1위 타이틀을 거머쥘 기세로 강태가 다급하게 애국가를 부른다.
그러는 사이 문영은 침대를 빙 돌아 강태의 앞에 놓인 1인용 소파에 걸터앉았다. 새빨간 귓바퀴를 한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잤어?”
강태가 그제야 눈을 뜬다. 싱긋 웃는 얼굴에 대고 고개를 끄덕끄덕.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 인사답지 않은 말이 제멋대로 툭 튀어나올 것 같다. 넌 아침에도 엄청 예쁘다, 같은.
강태는 입을 여는 대신 이불을 스윽 잡아당겨 다리를 덮는 쪽을 택했다. 다리 사이 뜬 해가 여즉 환했다. 그 손짓에 문영이 피식 웃는다.
“예상은 했지만, 아침에도 엄청나네?”
“뭐, 뭐, 뭐가?”
강태에게 문영이 그랬듯 문영에게 강태도 매우 새로웠다. 어젯밤엔 절대 지치지 않는 종마처럼 굴더니 아침엔 부는 바람에도 수줍어하는 아기 고라니 같다. 매 순간이 달라서 다음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궁금하다. 그리고 문영은 궁금한 건 절대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뭐해?”
"오늘? 뭐... 그냥, 관광?"
"그래? 가자. 내가 에스코트 해줄게."
문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강태가 벙찐 얼굴로 문영을 바라본다.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코트요? 단어 선택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에스코트든 가이드든 같이 있어준다는 거니까.
강태의 맘 속에 작은 기대가 피어 올랐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원나잇이 원나잇이 아니게 될 수도 있어. 나의 신념이 무너진 게 아니라 이루어지기 시작한 걸지도 몰라.
번지기 시작한 미소를 감출 수 없어 강태가 손으로 애꿎은 입가만 문지르는데, 문영이 물었다.
“그 전에, 아침 먹자.”
“아, 난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서 괜찮...”
“난 안 괜찮아. 배고파. 먹어야겠어.”
“아, 그럼 먹으러 나가자.”
강태가 침대를 빠져나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살았으니까 아침은 당연히...
“빵...?”
강태는 제 추측에 제법 자신이 있었으나 문영은 고개를 저었다. 문영은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팔을 뻗어 강태의 어깨를 살짝 아래로 누르며 다시 침대에 앉혔다.
“캔디.”
“캔디?”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에서 시작해 쇄골과 어깨를 지나 목으로 타고 올라오는 손끝. 강태가 어깨를 움츠렸다. 귓바퀴가 또 다시 달아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기다랗고 얇은 손가락이 강태의 뺨을 감싼다. 점점 다가오는 분홍빛 입술은 강태의 시선을 끝까지 잡아채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Caramelle alla fragola. (딸기사탕.)”
귓가에서 나즈막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뜨거운 입술이 귓바퀴를 물었다. 두 팔로 문영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강태는 생각했다. 자신의 여행은 아무래도 고문영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것이었나보다고, 생애 처음 본 이 원더랜드에 나는 기꺼이 뛰어들겠노라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