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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문영주리

​엘

 

어릴적의 문영이는 온기를 알지 못했다. 타인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삶 속에 갖혀 살았기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떠한 감정인지 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알지 못했던 문영이의 첫사랑. 오늘은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서로의 다섯 번째 계절이 될 뻔했던 이야기를 타인의 시선으로 풀어보려한다.

 

***

 

“오... 오지 마.”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잔뜩 울상인 표정. 그때의 주리는 두렵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영이 네가 미워. 한껏 일그러져 울상인 그 표정이 주리의 감정들을 오롯이 문영이에게 전해주었다.

 

“...”

“저리 가...”

 

말은 가라고 해도 주리에게는 또 다시 자신이 필요할 거라고. 문영이는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리 가!!”

 

두려움에 젖은 주리는 용기내어 한 발 더 내딛은 문영이에게 들고 있던 물통을 던졌다. 물통 안에 들어있던 물이 문영이의 가슴께에 튀겨 옷 위에 빨간 얼룩이 남았다. 그 얼룩은 마치 문영이 받은 보이지 않는 상처를 겉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제발... 저리 가!”

 

어린 문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주리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유. 그리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 또한 그러했다.

 

문영이는 주리가 혼자가 되길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과 웃으며 과거는 없었다는 듯 뛰어노는 주리가 못마땅했다. 그런 애들말고 나를 봐달라고. 감정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문영이의 일그러진 투정이었다.

 

***

 

주리와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는 이상하게도 불행의 연속이었다. 정리하기 귀찮아 마구 넣어두었다 필요할 때 보면 꼭 엉켜있는 목걸이들처럼, 언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잔뜩 엉킨 실타래처럼,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다...”

 

주체 없는 그리움. 얼마나 추상적이고 아픈 말인지. 주체가 없다는 말을 조금 바꾸어 이야기 해보자면 그리움을 달랠 수 있다는 추억이 없다는 것. 어린 문영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이름 모를 그 감정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성. 예로부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었다지. 엄마는 실종되고 그 이후 아빠라는 인간은 술에 절어 점점 피폐해져 갔다.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정신 상태도 함께 악화되었다. 문영이는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저주받은 성을 떠나지 못했다.

 

***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문영은 저주받은 성에서 지냈다. 문영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오랜 시간을 주리를 짝사랑하며 살았다. 짝사랑의 다른 이름은 집착. 상대가 원치 않는 사랑은 냉정히 보면 집착이고 욕심이었다.

 

성진시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보니 의도하지 않아도 주리와 학교가 겹쳤다. 문영의 시선 끝에는 항상 주리가 존재했고 무의식의 끝에도 그러했다. 사람의 시선에는 묘한 힘이 있기에 직접 건드리거나 말을 걸지 않아도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시작된 문영이의 시선은 항상 주리의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끝났다. 그 일방적인 시선은 계속되었고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에 결국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터져버렸다.

 

늦은 저녁, 단둘이 남은 교실.

 

“고문영...”

“... 뭐.”

“제발, 제발... 나 좀 그만 쳐다봐.”

“뭐...?”

 

당황스럽던 문영이의 감정은 순식간에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언제부터 주리를 보고 있었던가? 다른 것도 아닌 사람을, 감히 내가 원했던 것인가?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 주리가 그 정적을 깼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려내며 힘겹게 낸 목소리는 사시나무가 떨리는 듯 했다.

 

“고문영 너는 진짜, 우주 최고로, 나쁜 년이야...”

“...”

“내가 그렇게... 그렇게, 싫어?”

“...... 아니, 좋아해.”

“어...? 뭐라고?”

 

문영이 자신도 제가 한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생소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스러워서, 곧 마주하게 될 주리의 표정이 두려워서.

 

그렇게 서서히 고개를 들어 마주본 주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저를 경멸하는 듯한 그 표정이 너무나 아파서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다급히 교실을 뛰쳐나왔다. 그 표정은 사진처럼 또렷이 문영이의 기억속에 남아 또 다른 악몽을 만들어냈다.

 

***

 

“사랑해.”

“...”

“사랑해 고문영.”

“...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귓가에 들려오는 주리의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그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문영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정한 손길, 따뜻한 입맞춤, 포근한 말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느끼게 될 무기력, 공허함, 외로움.

 

***

 

꿈에서라도 보면 좋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은 문영이에게 있어 그저 허울 좋은 거짓이었다. 문영이에게 이 꿈은 악몽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어떤 악몽보다도 더 괴로웠다. 꿈에 등장하는 주리는 자꾸만 알아서는 안됐던 감정들을 일깨워주었다. 일테면 사람의 온기나 사랑이 주는 안정감과 같은 감정들. 깨어나고도 괴롭게하는 끈질긴 악몽이었다.

 

***

 

그렇게 흐지부지 끝난 사랑은 오랜 기간 꿈 속에서 문영이를 괴롭혔다. 둘은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뒤로 더는 볼 일이 없었다. 갈수록 기억이 흐려지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문영의 머릿속에서 주리의 얼굴 또한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문영은 매일 아침 기도했다. 내가 이 끈질긴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너의 얼굴을 잊지 않기를.

 

“뜬금없이 찾아와선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뻔한 바램, 희망이 없는 기도는 항상 서글펐다. 꿈에 주리가 나오면 매일 아침 그 이름을 잊을까 되뇌이고 얼굴이 더 흐려질까 수십 번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내었다. 지독한 짝사랑이었고 악몽이었으며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

 

“사랑해.”

“너... 그 말, 진심이야...?”

“그럼, 당연한 말을. 사랑해.”

“... 나도.”

“사랑해, 고문영.”

 

주리가 문영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살포시 이마를 맞대고 찬란하게 웃어보였다. 주리는 남은 손으로 떨리는 문영이의 손을 맞잡았고 문영이는 턱을 들어 둘의 입술이 더 가깝게했다.  주리가 문영의 목선을 따라 훑으며 턱을 잡아 입술을 맞물렸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해 머지않아 들려오는 질척이는 혀가 섞이는 소리. 달콤했다. 문영이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내가 달랐더라면 우리의 결말도 달랐을까 스스로 자책하길 수백 번. 문영이는 이 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행복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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