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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야수

​문영강태

w. 달달구리

 

 

 

*'사이코지만 괜찮아' 원작의 설정을 일부만 가져왔음을 미리 밝힙니다.

 

 

"There is the great lesson of 'Beauty and the Beast,' that a thing must be loved before it is lovable."

 

― Chesterton, G. K. (Gilbert Keith)

 

*

 

 

 

 

 

"미녀와 야수는 중세 프랑스에 보몽 부인이라는 여자가 쓴 동화인데, 이게 현대에 와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동화작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동화를 읽었는지 모른다. 모든 아이가 자라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신데렐라, 백설공주, 빨간 구두 같은 고전부터 현대에 나온 많은 사람이 생소해 할 제목의 동화까지. 대부분 '옛날 옛적'으로 시작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 범벅뭉치를 다른 사람들이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동심이니 꿈이니 지껄일 때 문영은 그 동화를 새롭게 볼 줄 알았다.

 

 

"근데 그건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한 어른들의 주입식 메세지일 뿐이에요."

 

 

뭐 착하게 살다 보면 복 받는다? 외모로 차별하지 말자? 물거품이 되더라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라? 아니, 흥부는 그 거지 같은 유산상속 제도 때문에 장남이 아니어서 가난했다. 제 새끼 간수도 잘 못 하면서 남의 새끼까지 신경 쓰지 말자. 약혼자가 있는 남자를 넘보았다가는 천벌을 받는다. 인물들이 어떤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이 멍청하고 착하고 순진한 인물들을 앞세워 작가는 현실의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욕구, 또 바뀌지 않는 잔혹성과 폭력성을 얘기할 뿐이니까. 동화는 닿지 못할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꿈을 심어주는 환각제가 아니라 진흙탕 속에 처박힌 발을 내려다보게 만드는 각성제다.

 

 

"미녀와 야수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다룬 동화예요. 저주를 받아 성에 홀로 살게 된 야수가 인질로 성에 들어온 벨이란 아가씨를 자기 방식대로 길들인 이야기죠."

 

 

순진해 빠진 벨은 교활한 야수에게 조련당하고 길들어 야수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뭐겠어, 멍청하게 상대방의 작은 호의에 마음을 다 내주지 말란 거지. 이상한 로망과 설렘에 휩싸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저의 현실이 얼마나 시궁창인지 깨닫지 못한 불쌍한 벨을 위해 애도하며, 문영은 그렇게 만족스럽게 강의를 마쳤다.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학생들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영에게 찬사를 보냈다. 정말 최고의 수업이었어요. 오늘 진짜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작가님, 다음에도 한 번 더 와주셔서 강의해주세요. 그러면서 싸인과 사진 한 장만 부탁한다는 요청도 잊지 않았다. 문영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요. 줄 서요, 해줄 테니까.

 

어느새 강의실은 문영의 팬싸인회장으로 변했고 문영은 네가 한 번 웃을 때마다 책이 한 권씩 더 팔리니 제발 팬들한테 잘 웃으라고 신신당부한 상인의 말을 곱씹으며 최대한 입꼬리를 올렸다. 15분이 좀 지나고 마지막으로 체크무늬 남방을 걸친 남학생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영에게 다가왔다. 문영은 다음 스케줄이 몇 시였는지 생각하며 슬쩍 강의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2분 안에는 이 지겨운 팬서비스를 끝내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 시각에 늦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영이지만 그랬다가는 상인에게 들을 잔소리가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어서 문영은 조금은 짜증이 묻어나는 투로 제 앞의 남학생에게 재촉했다.

 

 

"그래, 어디 해줄까."

 

"...예?"

 

"싸인. 그거 받으러 온 거 아냐?"

 

"아닌데요."

 

"그럼 사진?"

 

"그것도 아닌데."

 

"뭐야, 사람 놀리니?"

 

 

뭐 하나는 바라는 것처럼 다가왔으면서 싸인도 사진도 다 아니라면 뭘 바라는 거래. 아, 혹시 수작이라도 부리려는 건가? 뭐, 좀 생기긴 했는데 너무 어린애는 별로인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다부진 얼굴을 보며 문영은 제 얄팍한 인내심이 곧 끊어질 걸 느꼈다. 곧 그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질문이든 감상이든 빨리 말해주면 좋겠는데. 내가 좀 많이 바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뭘?"

 

"벨이 순진하고 멍청해서 야수 곁에 남았다고 생각하냐고요."

 

 

그렇게 질문하는 어투가 단순한 질문이 목적이 아닌 듯 조금 날이 선 게 아무래도 오늘 강의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 다시 말해 활자 속에 숨겨진 메세지를 찾지 못하는 '븅신'들 중 하나인가 보다- 문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피곤하게 됐네. 1분 안에는 가야 하는데. 제 대답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문영은 어떤 답을 해야 빨리 마무리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그럼 뭐, 벨이 정말 야수를 사랑할 이유가 있어서 옆에 남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야수 곁에 남을 이유가 뭐가 있지? 뭐, 사랑해서?"

 

"...예."

 

"와, 이걸 순수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지, 머릿속이 그렇게 꽃밭이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을 해줘야 할지 고민되네."

 

 

뉘 집 도련님이신지는 몰라도 곱게 자랐겠다 싶어 문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손에 쥐고 있던 펜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에 상대가 조금은 놀란 듯 안 그래도 큰 두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있지, 학생,"

 

"문강태입니다."

 

"그래 문강태. 아까 한 시간 내내 열심히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은 거 보면 이렇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준다고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에게는 늘 동기, 목적, 욕망 그런 게 있어. 이유 없는 선의, 목적 없는 사랑? 그런 게 어딨어, 다 쓸모가 있고 필요가 있으니까 곁에 두는 거지.

 

 

"아, 벨이 마냥 순진하고 멍청하단 건 취소. 그건 실수. 벨이 야수의 술수에 넘어간 건 맞지만 가난한 집에서 벗어나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을 살게 됐으니까 어느 한 목적을 이룬 거지. 뭐, 결과적으로는 둘 다 윈윈이니까 이 동화가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

 

"이해 못 한 눈치네."

 

"아니요,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설명을 알아들은 눈치는 아닌데 상황 파악할 줄 아는 눈치는 있는 건지 체크남방 학생, 강태는 문영에게 그럼 안녕히 가시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곤 문영에게서 돌아서 뒤도 안 돌아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문영이 드디어 귀찮은 혹을 다 떼어 냈다는 생각에 피곤함을 감추지 않고서 하품을 할 때, 갑자기 강태가 우뚝 섰다.

 

 

"A thing must be loved before it is lovable(무언가는 사랑스럽기 전에 먼저 사랑받아야 한다)."

 

"...뭐야."

 

"작가님 수업에 동의 못 하겠다는 제 답이요. 수업은 잘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볼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뭐? 야, 야!"

 

"그럼 정말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강태는 문영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

 

 

 

 

 

뭐야, 재수 없어. 문영은 꽤 발칙한 강태의 마지막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의실을 나섰다. 뭐, 사랑스럽기 전에 사랑을 받아? 웃기고 있네. 그런 게 어딨어. 사랑스럽지 못한 것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게 맞지. 그렇게 씩씩대며 주차장으로 쪽으로 걸어가 저 멀리서 제게 급하게 손짓하며 왜 이제 나오냐고 한소리 하는 상인에게 닥치라고 친절히 답해주고 문영은 차 뒷좌석에 앉아 질끈 눈을 감았다. 재수 없는 놈. 재수 없는데 잘생긴 놈. 몰라, 관심 없어.

 

 

"오늘 강의 어땠어?"

 

"몰라."

 

"뭐, 저번처럼 십세라던가, 그런 말 안 했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아니, 니가 모르면 그걸 누가 알,"

 

"시끄러워, 골 울리니까 말 시키지 마."

 

 

나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말란 티를 온몸으로 내는데도 상인은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저는 다 담아 듣지도 않을 말을 혼자서 주절거렸다.

 

 

"아, 그 문영아. 내가 이번에 너 애니메이션 계약 건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네 케어를 못 해줄 것 같다."

 

"그래서?"

 

"네 매니저 역할 해줄 신입 하나 뽑아 놨으니까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만 좀 참으라고."

 

"싫어."

 

"그래. …아니, 뭐?"

 

 

단칼에 거절하는 문영에 상인은 당황한 듯, 문영이 있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옆에서 빵-하고 경적을 울리는 차에 움찔하고 다시 운전대를 바로 잡았다.

 

 

"죽을래? 앞에 안 봐? 운전 똑바로 안 하지?"

 

"아니, 문영아 너 스케줄 관리도 해야 하고 차 픽업도 해야 하는데 싫다고 하면,"

 

"됐고, 싫다고. 그냥 나 혼자 다닐게."

 

"야, 누구 맘 편하라고 널 혼자 두긴 혼자 둬?"

 

"내 맘이 제일 편해야지."

 

"너 이번 주에 스케줄도 겁나 많단 말이야. 안돼. 너 혼자 못 둬."

 

"혼자 둬."

 

"못 둬."

 

 

둬. 못 둬. 둬. 못 둬. 랩배틀이라도 하는 듯,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가던 둘의 대화는 상인의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고서야 끊겼다.

 

-문강태

 

어딘가 익숙한 이름 석 글자에 문영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까 강의실에서 당돌하던 체크남방 남학생의 이름이란 걸 기억해내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 잘생긴 재수 없는 븅신. 근데 이대표가 걔 번호를 왜 갖고 있대? 상인은 운전하랴, 문영을 설득하랴 바쁜 와중에 걸려온 전화가 짜증이 나는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네 강태씨."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어이구, 제가 지금 차 운전 중이어서 전화 받기가 좀 그르네? 나중에 다시 통화,"

 

-"저 일 못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하는 얘기가 일 관둔다는 얘기라니. 이대표가 뽑았다는 신입이 쟤였구나. 촉이 딱 왔다. 문영은 갑자기 흥미가 돋은 얼굴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네?"

 

-"작가님과 일. 못할 것 같다고요."

 

"아니, 갑자기 왜,"

 

-"안 맞을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안 맞을지, 잘 맞을지 같이 지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괜한 승부욕이 발동한 건 왜인지 모르겠다. 청개구리 심보인 건지 뭔지 하지 말라면 하고 싶어지는 인간의 본능이 저 신입을 일주일간 곁에 붙들어둬야겠다고 소리쳤다. 문영은 늘 저가 원하는 게 무언지 확실히 알았고 그 욕망에 따르는 걸 주저하지도 않았다. 내 본능이 얘기하잖아 지금, 문강태 쟤가 탐난다고. 그 예쁘고 재수 없는 븅신이 왜 갑자기 탐이 나는 건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뭐 욕망에 늘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작가님도 같이 계신 건가요, 그럼 더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저 일 안, 아니 못합니다."

 

"두 배. 네가 받기로 한 금액의 두 배, 아니 세 배 줄 테니까 잔말 말고 나랑 일해."

 

 

그리고 그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탐나면 가져야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야수가 벨을 손에 넣으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하며 문영은 상인이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더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쿨하게 강태가 받기로 한 돈의 세 배를 불렀다.

 

 

"야, 무슨 세 배를 줘?"

 

"왜, 내가 그만큼 벌어다 주잖아. 날 위해 쓰는 돈인데 그게 아까워?"

 

"아니이, 그게 아니라,"

 

-"...늘 이렇게 무슨 문제든 돈으로 해결했나 본데, 필요 없어요. 거절합니다."

 

 

안타깝게도 문영의 노력 아닌 노력이 무색하게 강태는 단칼에 거절했다. 상인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표정이 일그러진 문영에 침을 꿀꺽 삼켰다. 얘 또 터지면 감당하기 힘든데, 하아…. 문영은 어느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강태에게 물었다.

 

 

"왜 부족해? 더 줘?"

 

-"돈이면 됐습니다."

 

"그럼 돈이 아니면 몸?"

 

-"그게 돈보다 가치가 있습니까?"

 

"아, 그럼 뭘 원하는데!"

 

-"그냥 작가님과 엮이는 일 없으면 싶네요."

 

"왜, 나 너 필요해."

 

 

나 지금 니가 존나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일주일간 내 옆에 딱 붙어서 지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문영에 강태는 더 거절하는 것도 질린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만 끊겠습니다.

 

 

"아 띵 머스트 비 럽드 비포 잇 이즈 러버블."

 

-"...뭡니까?"

 

"아까 네가 한 말 아냐?"

 

-"……."

 

 

이게 진짜 먹힐 줄은 몰랐는데. 금방이라도 뚝 전화를 끊을 것처럼 굴었던 강태는 어느새 문영이 하는 얘기에 토도 안 달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꼭 이상하리만큼 순수한 신념이 있는 애들은 지가 한 말을 지키려고 애쓴단 말이야. 문영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있지, 난 그 말 못 믿겠거든? 그러니까,

 

 

"네가 증명해봐."

 

-"그걸 왜 내가 증명해야 합니까?"

 

"아, 그럼 증명도 못 할 말을 아까 내 앞에서는 한 시간의 강의에 반박한다고 잘도 떠든 거야?"

 

-"아니,"

 

"증명해내면 소원 들어줄게, 그게 뭐든 간에."

 

-"……."

 

"증명 못 해도 아까 약속한 금액은 줄 거고. 이 정도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텐데?"

 

-"...얘기 끝났습니까?"

 

 

오케이. 걸려들었어. 조금 누그러진 강태의 목소리에 문영은 히죽 웃으며 살갑게 답했다.

 

 

"그럼 내일 보자구요, 강태씨."

 

-"누구 마음대로 내일 보자고,"

 

"끊어요."

 

 

멋대로 전화를 뚝 끊고서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대며 웃는 문영에 상인은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재밌어."

 

"...문영아, 나는 진짜 니가 이럴 때마다 너무 무섭다."

 

"일주일이랬지? 출장 잘 다녀와요, 대표님."

 

"너 진짜 왜 그래, 무섭게! 니가 언제 날 대표님이라고 불렀다고,"

 

"쉿. 나 진짜 잘 거니까 말 시키지 마."

 

 

그렇게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은 문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꽤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며 오랜만에 단잠에 들었다.

 

 

 

 

 

*

 

 

 

 

 

강태는 좀처럼 불쌍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천성이 그랬다. 길가에 사람들에게 밟힌 꽃, 아파트 주민들한테 쫓겨난 길고양이,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아이. 그런 불쌍한 것들을 마주칠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고 눈길을 주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또 강태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는 일이 없고, 늘 어려운 일이 있는 친구가 생기면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힘든 일을 도맡아서 하고, 저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개의치 않고 친구들에게 먼저 나누었다. 그렇다고 생색을 내는 일도 없어 모두가 강태를 좋아했다. 강태도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딱 한 아이를 빼고.

 

그 아이는 자주 혼자였다. 아니, 늘 혼자였다. 또래 애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그 애는 늘 고풍스러운 원피스에 단정하게 까만 머리를 길렀다. 짓궂은 몇몇 애들이 그 애의 옷차림을 놀리다가도 그 애가 고개를 들어 쌀쌀맞은 얼굴로 빤히 쳐다보면 무서워 덜덜 떨었다. 그 애는 그래서 이름 대신에 이렇게 불렸다, 마녀.

 

마녀는 뭐든지 혼자 했다. 짝피구를 할 때도, 짝꿍 얼굴 그려주기를 할 때도. 강태는 그게 퍽 안쓰러웠다. 늘 혼자 외로울 그 애가 불쌍해서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애의 간식을 챙겨주거나 선뜻 나서서 그 애와 짝을 하겠다는 친구가 없을 때 번쩍 손을 들어 그 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또 친구들이 그 애에 대해서 안 좋게 말을 하면 중재자가 되어 두둔하기도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런 강태를 칭찬했다. 딱 그 애만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강태를 볼 뿐이었다.

 

 

"문영아, 내일까지 이거랑 이거 준비해야 하고. 또,"

 

"그만해."

 

"어?"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착한 척 챙겨주는 거 그만하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강태는 점점 웃음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는 걸 느꼈다. 그 애는 다른 애들이 저를 놀릴 때 빤히 보던 것처럼 강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 다 알아, 너 나 안 좋아하는 거. 억지로 좋아하는 척, 괜찮은 척 굴 필요 없어.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그렇게 말한 그 애의 두 눈에는 어떤 악의 하나 없이 티 없게 맑아서 강태는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애는 사람을 정확히 꿰뚫어 볼 줄 알았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 뒤편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어떤 욕망이 깃들어 있는지 무섭게 알아맞혔다. 강태는 어떤 말도 못 한 채 그 길로 집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 애, 문영은 일주일 후 집안 사정으로 전학을 갔다.

 

강태는 그날 이후로 매 순간 제 위선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난 그냥 사람을 좋아하고 선의를 베풀려 했을 뿐이라고. 정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게 아닌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기에 괴로웠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봉사란 봉사는 다 다니며 사회복지사를 꿈꾸기도 했다. 그런 강태에게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왔다. 번번이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강태는 진심으로 아닌 걸 알아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느라 고역을 치러야 했다.

 

 

 

 

 

*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특출 난 것도 없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늦게서야 대학을 다니게 됐다. 어디에서나 그랬듯 강태의 평판은 좋았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섬세하고, 등등 모든 좋은 수식어들은 강태의 이름 앞에 붙었다. 이제 조금 강태 저 자신도 스스로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위선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의실에서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서점에만 가도 고문영 그 이름 석 글자가 여기저기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만나고 싶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똑똑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동화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라며 한 시간을 그 특유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하던 문영에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 건 일종의 사죄였다. 난 널 이용하려고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일말의 미안함을 훌훌 털어내고 싶었다. 다시는 보지 말잔 말도 진심이었다.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각자, 그렇게 부딪히지 말고 따로 잘 가자. 그런데 하필이면 아는 형의 추천으로 구한 알바가 문영이 전속계약을 맺은 출판사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강태가 제 앞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문영에게 도대체 이건 뭐냐는 의미로 아까 전 문영이 건넨 종이를 흔들었다.

 

 

"뭡니까, 이건?"

 

 

스케치북을 북 찢어 대충 아무 펜이나 집어 휘갈겨 쓴 것 같은 '계약서' 세 글자에 강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필시 저가 오기 한 10분 전 급하게 적었을 게 분명한 성의 없는 계약서와 안 어울리게 문영은 제법 진지한 태도로 답했다.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야지 싶어서. 나름 엄연한 계약인데 구두 합의로만 끝내기는 좀 찜찜해서 말이야."

 

"근데 왜 자꾸 반말이지?"

 

"그러는 지도 열라 자연스럽게 말 까고 있으면서. 알아보니까 갑이던데, 나랑? 그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동안이네."

 

"동안은 무슨."

 

"칭찬을 해줘도 지랄이야. 계약서는 잘 읽어봤어?"

 

"이런 것도 계약서라고 치나?"

 

"계약서든 내기든 뭐라고 부르던 너와 나 사이에 정확한 거래가 오가야 한다는 의미지."

 

 

문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강태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낚아채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본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고문영을 '갑'으로 문강태를 '을'로 하고 아래와 같은 계약을 체결한다. 을은 갑의 작업실에 상주하며 갑의 보조를 맡는다. 보조 일에는 커피 심부름, 같이 밥 먹기, 산책하기 등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강아지야? 밥 먹이고 산책시키게?"

 

"조용히 해봐, 무드 깨지게."

 

"계약서 읽으면서 깰 무드도 있나."

 

"에헴, 아무튼 그렇고, 여기부터가 제일 중요해, 잘 들어."

 

 

을은 갑에게 한 말, '무언가는 사랑스럽기 전에 먼저 사랑받아야 한다'가 가능함을 일주일 안에 증명해낸다. 여기서 을의 '무언가'는 갑으로 칭한다. 증명에 성공할 시 갑은 을의 어떤 요구라도 들어준다. 그 대목에서 강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해서 지금 여기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쓰고 있는 건지. 문영은 그런 강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증명할 자신이 없어?"

 

"왜 그 무언가가 너인 건데."

 

"사랑스럽기 전에 먼저 사랑할 거면 확실하게 네가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걸 대상으로 해야지. 너 나 안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날 사랑해봐."

 

"내가 거짓말하면? 사실 안 그런데 그런 척 연기하면 어쩔 건데?"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강태에 문영은 씨익 웃으며 가방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욱해진 연기에 얼굴을 찌푸린 강태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문영은 후- 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넌 나 못 속여. 15년 전이든 지금이든."

 

"...알고 있었어?"

 

"너에 대해서 좀 알아봤다니까."

 

"왜 하필 나인데."

 

"음, 그냥? 너 예뻐서."

 

 

그렇게 말하며 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해봐, 행운을 빌어. 강태는 어떤 답도 못한 채 계약서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저 주먹만 꾹 말아 쥘 뿐이었다.

 

 

  

*

 

 

 

 

 

계약서니 뭐니 번거로운 절차를 거친 관계라기엔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바쁜 일정 가운데 틀어질 시간도 없긴 했다. 그래, 겉보기에는 그랬다. 나흘째 강태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제 겨우 사흘이 남았다. 사실 애초 이런 내기를 한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랑이 무슨, 작동시키면 움직이는 기계도 아니고, 사랑하겠다 하면 사랑이 되냐고. 그런 강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문영은 강태가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내일 학교에서 할 특강 자료를 검토했다.

 

 

'마녀와 야수'

 

"고문영, 거기 오타 났어."

 

"응? 오타?"

 

"응, 거기."

 

"어디?"

 

"여기, 미녀와 야수 말고 마녀와 야수라고 쓰여 있다고."

 

 

손가락 끝에 닿은 마녀란 단어가 왠지 모르게 쿡 찔렸다. 정작 문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강태는 제 심장이 다 저릿한 것 같았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문영을 부른 적은 없었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기에 아직 다 벗지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눌렀다.

 

 

"오타 아니야. 마녀와 야수 맞아."

 

 

그렇게 말하며 문영은 이미 진즉 다 비워 얼음만 남은 커피잔을 빨대로 쪼록 빨았다. 강태는 머쓱함에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문영에게 컵을 버리고 오겠다며 손을 쭉 내밀었다. 문영은 컵을 줄 생각도 않고 한참 강태의 손을 바라보더니 장난스럽게 제 손을 포개어 꽉 쥐었다. 시린 냉기가 느껴져야 할 손에 갑자기 닿은 온기에 강태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뺐다.

 

 

"뭐 하는 거야."

 

"네가 내기에서 이길 수 없게 더 얄미우라고 미운 짓."

 

"...이게 뭐가 미운 짓인데."

 

"원래 밉게 태어나면 뭘 해도 미운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 문영이 괜히 쿡 찔려 강태는 헛웃음도 내지 못했다. 문영은 자료를 대충 테이블 위로 툭 던지고 의자에 뒤로 확 기대더니 대뜸 미녀와 야수에서 제일 안 된 인물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벨? 아니, 야수? 더더욱 아니야.

 

 

"그럼 누군데?"

 

"마녀. 야수가 된 왕자를 사랑했던 마녀."

 

 

야수가 왜 야수가 되었는지는 알지? 잘생긴 왕자님이던 야수가 마녀의 청혼을 거절했거든, 마녀가 못났다는 이유로. 그렇게 뻥! 차이고 화가 난 마녀가 왕자한테 저주를 거는데, 걸 거면 좀 확실히 걸지 진정한 사랑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푸는 방법까지 알려줘. 그러다가 순진한 벨이 야수한테 길들여져서 둘이 알콩달콩 콩 볶고 결말 가서는 진부하게 야수가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저주가 풀리잖아. 근데 마녀는,

 

 

"날 때부터 마녀여서 진정한 사랑이니 뭐니 알아도 여전히 못난 마녀야."

 

"......고문영,"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그렇게 태어났는데 그렇게 사는 거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강태는 이런 상황에서 변변찮은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저를 탓했다. 사실 어색하게 느끼는 건 강태 뿐이었다. 문영은 또 언제 심각했냐는 듯 웃으며 데스크를 쿵 내리쳤다.

 

 

"아 깜짝아!"

 

"그래서!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 더 못나지지도 더 나아지려고도 말고 그냥 생긴 대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인정하면서 살면 애블바리 비 해피!-가 이번 특강 주제인데, 어때? 이번에도 반대야?"

 

"내가 뭐라고 네 강의인데 반대하고 말 게 있어."

 

"왜, 저번에는 잘만 따졌잖아. 사랑스럽기 이전에 사랑받아야 한다며. 그래서 증명할 준비는 잘돼 가?"

 

"어, 그게, 그러니까,"

 

 

문강태. 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둥둥 울려 심장까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문영은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강태를 빤히 보았다.

 

 

"애쓰지 마. 애쓰면 착각하게 돼, 니가 지금 느끼는 거 연민, 동정 그런 거거든. 15년 전처럼."

 

 

여전히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차가운 말을 끝으로 문영은 피곤하다며 좀 쉬겠다고 침실로 올라갔다. 강태는 또 15년 전 그날처럼 턱 막히는 숨을 겨우 몰아쉬고 답답함에 가슴만 칠 뿐이었다.

 

 

 

 

 

*

 

 

 

 

 

여섯째 날이었다.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지 벌써 내일이 마지막 날이었다. 우습게도 강태는 이제 내기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냥 그새 익숙해진 문영과의 식사, 산책, 커피타임, 작업에 스며들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쉴 틈 없는 일정을 다 소화하고 오랜만에 자유 시간이었다. 대뜸 놀이공원이 가고 싶다는 문영의 말에 강태는 이 추위에 무슨 놀이공원이냐고 타박하면서도 핸드폰으로 자유이용권을 예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막상 도착하니 강태가 조금 더 들떴던 건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뭐? 여기까지 와서, 자유이용권 다 끊어놓고 안 탄다고?"

 

"어."

 

"왜?"

 

"무서워."

 

 

너무도 당당히 난 무서우니 안 탈 거다-라며 자유이용권을 끊은 보람도 못 느끼게 하는 문영에 강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니, 니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게 웃기잖아."

 

"그냥 회전목마나 타고 가자. 이상한 거 타서 속 버리는 것보다 그게 나아."

 

 

그렇게 두 사람은 바이킹 대신 회전목마만 대여섯 번을 타고 마지막으로 대관람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러니까 우리 데이트 온 연인 같다, 그치?"

 

 

장난스럽게 제게 묻는 문영에 강태는 저도 모르게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네."

 

"뭐야, 내일 마지막 날이라고 연기하는 거야?“

 


정말 문영의 말대로 내일이 마지막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야경이 예뻐서 그런 건지, 단둘이 앉아 있는 대관람차 안의 공기가 바깥과 다르게 후끈해서 그런 건지 강태는 문영을 따라 장난스레 답하기가 싫었다. 강태는 문영이 자주 제게 그러듯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내가 어떤 것 같은데?"

 

"연기하지 마, 그래봤자 소원 안 들어줄 거니까."

 

 

그런 강태가 어색한지 문영은 괜히 말을 톡 쏘며 눈을 흘겼다. 강태는 진심이라는 듯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연기가 아니면?"

 

"아닌 게 아니니까 그런 가정을 할 필요도 없잖아, 귀찮게 그런 걸 왜 해.”

 

“고문영. 나 봐봐.”

 

 

네가 예전에 그랬지, 끝만 좋으면 된다고. 그러면 해피엔딩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시작이 어떻고 과정이 어쨌든, 해피엔딩 하자. 네 눈에 읽히는 내 마음이 사랑으로 포장된 연민인지 동정인지는 그냥 이번은 모른 척 넘어가 줘. 가끔은 의도가 뭔지, 동기가 뭔지 안 뜯어보고 있는 그대로 봐도 좋잖아. 활자 속에 어떤 메시지를 숨겨놨는지 귀신같이 잘 알아내는 네가 봐도 모르게 투명하게 담아줄게.

 

곧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틈 하나 없이 포개졌다. 뭐 하나 덜한 것도, 더한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나누다 밤이 저물어갔다.

 

 

 

 

 

*

 

 

 

 

 

마지막 날이었다. 아무렇게나 접어서 데스크 서랍에 넣어놓았던 계약서 아닌 계약서를 꺼내놓고 문영은 평소에 짓는 웃음보다 한결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곧 강태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와 식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날이 추워서 오늘은 따뜻한 걸로 가져왔어.”

 

“네 소원 들어줄 때네.”

 

 

그렇게 말하는 문영에게 강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강의실에서 재회했던 그 날처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였다.

 

 

“소원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문영아, 니가 이겼어, 내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문영이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뭐?"

 

"내가 졌다고. 소원도 돈도 아무것도 안 줘도 돼."

 

 

진심인 듯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얄미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문영은 애써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 이겼어. 나 사랑하잖아, 너."

 

"아니, 내가 졌어."

 

"그냥 이긴 거로 해. 연기든 뭐든 그냥 속아줄 테니까."

 

"내가 졌다니깐."

 

"아니, 너 이겼어."

 

"졌어."

 

 

그 단호한 말에 결국 눈물이 한 방울 굴러떨어졌다. 그런 문영을 보는 강태의 표정은 뭔가 복잡미묘했다.

 

 

"아냐, 너 나 사랑해."

 

"응, 나 너 사랑해."

 

"아냐, 너 나 사랑한다니...... 뭐?"

 

 

곧 강태가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문영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으로 강태를 바라봤다.

 

 

“사랑스럽지 않을 걸 사랑하라며. 그러니까 내가 진 게 맞아.”

 

“잠깐, 나 이해 못 했어. 그러니까, 에이씨. 넌 무슨 설명을 그렇게 드럽게 못해!”

 

“니가 증명해 보랬잖아, 사랑스럽지 않은 걸 먼저 사랑할 수 있는지. 근데 네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먼저 알아버렸어.”

 

 

문영에게 등짝을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기만 하는 강태에 결국 문영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마녀와 야수는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고 진짜 사랑을 깨달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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