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짜선녀와 나무꾼
문영강태
육개장
옛날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 선량한 나무꾼 문 씨가 살았어. 문 씨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을 정성으로 키웠지. 풍족하지는 않은 가정 형편이었지만 소소하고 화목한 가족이었어.
마을 사람들도 모두 문 씨네 아이들을 좋아했어. 특히 두 아들 중 형은 나뭇가지로 매일 동네 길바닥에 앉아 하루 종일 그림을 쓱쓱 그리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마을에서 천재 화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지. 고놈 화원이 될 재목이구먼. 동네 어른들은 항상 지나가며 그 그림 실력에 감탄했어. 둘째 아들은 성격이 살갑고 다정한데 애교까지 있어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어. 종종 시장에 심부름을 나온 아이에게 동네 사람들이 엿가락을 조막만한 손에 쥐여주면 아이는 꾸벅 배꼽인사를 한 뒤 형에게 달려가 항상 엿가락을 반으로 똑 잘라 나누어 먹곤 했지. 그림에만 빠져있는 제 형도 챙기고 어린놈이 싹싹하니 굶을 일은 없겠다며 마을 사람들은 그런 아이를 사랑했어. 아, 참고로 난 그 형제랑 아주 친해. 거의 그 집 명예 둘째 아들이지. 안 물어봤다고? 이제 얘기를 시작할 건데 이 조재수님 소개는 좀 들어주는 게 예의 아니겠니? 그냥 빨리 시작이나 하라고? 참나, 알겠어. …뭐 어쨌든, 참 평화롭고 행복한 날들이었지.
어느 날, 새벽동이 틀 무렵 문 씨는 평소와 같이 나무를 하러 산을 올랐어.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산은 여름이었지만 매우 쌀쌀했지. 뜨듯한 누룽지로 배를 채웠지만 산을 오르며 금방 소화되어 출출해진 문 씨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아내가 싸준 시루떡을 꺼냈어. 팥고물을 잔뜩 묻힌 따끈따끈한 시루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돌 정도로 맛있어 보였지. 문 씨는 떡이 식을라 허겁지겁 떡을 입안으로 욱여넣었어. 해가 뜨고 더워지기 전에 얼른 나무를 끝내고 돌아가 시원한 콩국수를 먹을 생각에 문 씨는 후딱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 매일 나무를 해온 문 씨는 눈을 감고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산의 지리에 훤했어.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어. 분명 떡을 먹고 꽤 걸었는데도 계속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거든. 그 순간 문 씨의 머리에 전날 밤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여보, 요새 산에 산신님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몇 십 년간 산을 타온 문 씨도 산신님을 마주친 적은 없었어. 그러나 산신을 마주치면 다리가 땅에 꼭 붙어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오금이 저려 그대로 잡아먹혀 버린다는 이야기는 문 씨도 잘 알고 있었지. 문 씨는 침을 꼴깍 삼켰어. 주변이 급격히 서늘해지고 요상한 기운이 느껴졌거든. 스멀스멀 안개가 다리께를 감싸오자 문 씨는 빠르게 발을 옮겨 이곳을 벗어나려 했어.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지. 오늘 나무는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려 잽싸게 몸을 돌렸어. 그 순간 샛노란 불빛 두 개가 번쩍하고 지나갔어! 에그머니나! 후다닥 발을 돌리던 문 씨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꼿꼿이 서서 제 앞에 있는 생명체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 산신님인가? 두 눈을 꼭 감았다가 살며시 뜨니 마주쳐버린 번쩍이는 짐승의 눈에 문 씨는 입을 쩍 벌리고 까무러쳤어. 호랑이다!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호랑이는 아직 어린지 그 크기가 집채만 하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송곳니는 무시무시했지. 산신을 마주치면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더니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문 씨는 두 눈을 꼭 감았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엥? 문 씨가 눈을 다시 뜨고 호랑이를 바라봤어. 잘못 들은 건지 문 씨가 어버버하며 멀뚱멀뚱 호랑이를 바라보기만 하자 호랑이는 크게 으르렁거렸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을 테니 떡 내놔.”
이를 어쩌나, 하필 산을 오르며 간식으로 싸온 떡을 다 먹어버렸잖아. 하지만 떡과 함께 싸온 주먹밥이 있었어. 문 씨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짐 보따리를 뒤적였어. 물론 아직 물려가진 않았지만 정신은 똑바로 차려야지. 암, 그렇고말고.
“여… 여기 주먹밥이 있습니다… 이거라도…”
“아니, 밥은 싫어. 떡을 내놔.”
“떠… 떡은 제가 아까 다 먹어버렸는데…”
“그럼 널 잡아먹으면 되겠구나!”
어흥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호랑이에 문 씨는 꽥 소리를 질렀어. 여보! 상태야! 강태야! 아빠 죽는다! 문 씨는 눈을 꼭 감았지.
셋.
둘.
하나.
분명 날카로운 송곳니가 몸을 뚫고 들어와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문 씨가 슬그머니 눈을 뜨니 코앞에 다가온 호랑이가 물기는커녕 코를 찡긋하며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걸었다는 거야.
“상태? 강태? 자식의 이름인가?”
“예… 제, 제 두 아들입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저희 아이들은 굶어 죽고 말 겁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 여기서 널 잡아먹진 않으마. 너같이 늙은 남정네를 먹는 것보단 부들부들한 어린애를 먹는 것이 더 맛있겠지.”
“아, 애, 애들은 너무 작아서 한 입거리도 안 될 겁니다… 어찌나 작은지 동네 아이들에게 매일 놀림을 당하기 일쑤인데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가진 것도 없는 못난 애비인데도 효심이 지극한 착한 아이들입니다…”
문 씨가 나무를 베는 것 말고 잘하는 게 하나 더 있었어. 바로 감성팔이였지. 놀림을 당하기는커녕 동네에서 누구보다 이쁨 받고 자란 두 아들이지만 당장 그런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어. 말 한 번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인데,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 호랑이는 문 씨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꼬리를 살랑 흔들었어.
“그래. 그럼 당장 잡아먹지는 않으마.”
“가, 감사합니다! 산신님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10년 후에 친히 널 찾아갈 터이니 그동안 네 아들들을 한 번 잘 키워봐라.”
그 말을 하고 호랑이는 뒤를 돌아 순식간에 사라졌어. 문 씨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지. 큰일 났다! 가족이 위험해! 문 씨는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나 집으로 향해 달렸어. 10년이라고 얘기했지만 갑자기 마음이라도 바뀌어서 네 가족을 홀랑 다 잡아먹어버리면 어떡해. 문 씨의 머릿속엔 얼른 이 동네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다행히 문 씨가 도착한 집에는 아내와 두 아들이 멀쩡히 살아있었어. 문 씨는 우당탕탕 대문을 열고 들어와 얼른 이사를 가야 한다며 평화롭게 수를 놓고 있는 아내와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두 아들을 데리고 허겁지겁 짐을 쌌지. 정들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어. 당장이라도 호랑이가 냄새를 맡고 동네로 내려올지도 모르잖아. 영문도 모르고 소꿉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막내아들은 펑펑 울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어. 강태야, 그만 울어라. 종종 놀러 오면 되잖니. 어머니가 강태를 안아 어르고 달래도 강태는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려댔어. 내가 오래 봐서 아는데 강태가 은근히 눈물이 많거든. 보다 못한 아버지가 호랑이가 쫓아오니 그만 울라며 호통을 쳐도 강태는 호랑이 같은 거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되려 성질을 부렸대. 하지만 강태의 생떼는 먹히지 않았지. 호랑이한테 싸우자며 빽 소리를 쳐대는 쥐방울만한 강태의 입을 꼭 막은 채로 문 씨네 가족은 옆 동네, 옆 옆 동네를 거쳐 더 이상 익숙한 산들이 안 보일 때까지 걷고 또 걸었어.
그렇게 강태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고 아무 일 없이 10년이 흘렀어. 문 씨네 막내아들 강태는 어느새 방년 스무 살 꽃다운 나이가 되어 마을 처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멋진 남자가 되었지. 그 형인 상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이 소문을 타고 임금님의 귀까지 들어가 궁중화가인 화원이 되었어. 그야말로 집안의 경사였지! 하지만 문 씨네 가족은 상태를 따라 한양으로 가지 않고 시골마을에 그대로 남았어. 귀염둥이 조재수를 두고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형이 떠나고 허리를 크게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강태가 가업을 이어 나무꾼이 되었거든. 매일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온 강태의 송골송골한 땀방울들이 흉쇄 유돌근을 따라 흐르는 장관은 동네 처자들은 물론 사내들의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했어. 내가 봐도 조금 멋있긴 하더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태는 동네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명 인사인지 몰랐어. 심지어 자기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해서 혼인은 포기하고 형이랑 평생 부모님을 모시며 소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강태의 꿈이었다니까? 동네 사람들이 쑥스러움에 감히 말을 못 거는 것이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 한 강태였지. 내가 사실을 얘기해 줘도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도 않더라. 그래서 난 장난삼아 그냥 우리 둘 다 평생 부모님 모시고 재밌게 놀면서 살자고 했었는데 그날 때문에 우리 약속이 와장창 깨지게 되었지. 게다가 문강태 우선순위 4위는 항상 나였는데 그날 이후로 내가 한 칸 더 밀렸어. 아, 다시 생각해도 좀 섭섭하네? 나 섭섭한 거 안 궁금하니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얘기하라고? 진짜 서운하다….
그날은 그냥 평범한 일상들 중 하루였어.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를 하고, 잠시 쉬며 새참을 먹다가 마저 나무를 한 뒤 내려가는 것이 강태의 일과였지. 강태가 나무를 하러 가는 산에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그날 강태는 그 주변에서 나무를 하고 잠시 쉴 때 샘에 발을 담글 생각에 신나게 산을 올랐대.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너무 더운 거야. 산속인데도 이글이글 내리쬐는 해가 강태를 금세 지치게 했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강태는 슬쩍 웃옷을 벗고 다시 도끼를 들어 나무를 내리쳤어. 탄탄한 구릿빛의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땀이 햇볕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나며 참 눈부셨다고 하더라.
“오, 탐나.”
그 순간 강태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어. 강태는 잠시 도끼질을 멈추고 뒤를 휙 돌아봤지. 하지만 멀리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는 거야. 너무 더워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한 강태는 지게를 메고 물가로 향했어. 아무래도 쉬어야 할 것 같았거든. 졸졸졸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가자 작은 폭포와 그 주변에 동그랗게 만들어진 작은 샘이 있었지. 지게를 등에이고 샘에 발이나 담가보려 물가로 다가가는데, 샘 안에 누가 있는 것같이 뿌연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어. 풀숲에 가려 잘 안 보였는데 물가로 가까이 걸어갈수록 그 물체는 명백한 사람의 모습이었고 긴 머리 틈으로 살짝 보이는 가녀린 어깨선을 보아하니 도저히 남자의 어깨는 아니더래. 여자의 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태의 귀는 그저 긴 머리카락으로 덮인 등에도 터질 듯 달아올랐겠지. 놀란 강태가 허둥지둥 몸을 돌리자마자 발에 뭐가 툭 하고 채였어. 발치에 있는 것이 뭔가 하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아이고! 하늘하늘한 비단으로 짜인 고운 저고리에 날개옷마냥 반짝거리는 예쁜 치마였대. 부잣집 아가씨가 샘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나 봐. 강태는 휴식은 포기하고 얼른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나 뭐라나. 일부러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곤장을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태는 불안감으로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빠르게 뛰었지. 목에서 칼칼한 맛이 느껴지도록 빠르게 뛰어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한 강태는 숨을 몰아쉬며 적당한 곳에 털썩 짐을 내려놓고 앉아 땀을 닦았어. 일단 목이라도 축여야겠다고 생각한 강태가 물통을 찾으려 몸을 돌리자마자 이번엔 고라니가 나타났어. 아이고 깜짝이야! 강태는 당연히 파드득 놀랐지. 그런데 이 고라니 놈이 입에 요상한걸 물고 있는 거야. 그러고선 강태한테 받으라는 듯 주둥이를 들이밀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은 강태가 이건 또 무엇인고, 하고 살펴보니 좀 전의 그 아가씨의 옷이었어. 강태가 놀라 손에서 툭 떨어뜨리자 고라니는 다시 물어서 강태의 품에 밀어 넣더래. 거절은 거절이오. 받으시오. 고라니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 생각하겠지만 강태는 정말 울고 싶었다고 하더라.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도 믿기지 않는데 이놈의 고라니 새끼는 강태가 아무리 거부하고 옷을 바닥에 내려놓아도 입에 옷을 물고 강태를 졸졸 쫓아오니 당연히 울고 싶을 만도 하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잖아. 하는 수없이 고라니의 입에서 옷을 받아들고 강태는 다시 그 샘으로 발길을 돌렸어. 그 아가씨는 강태가 훔쳤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니 강태는 정말 혀를 콱 깨물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대. 물론 실제로 깨물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강태는 은근히 엄살이 심하거든.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몰라. 친한 사람 앞에서만 엄살 부리는데 내가 그 친한 사람이니까 아는 사실이지. 어쨌든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오자 강태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어. 돌아가고 싶어도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고라니는 강태를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지. 언제 데려온 건지 아까는 분명 한 마리였던 것이 세 마리로 늘어 강태의 탈출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더라고. 귀신이 곡하고도 남을 노릇이지. 다시 어느새 저 멀리 폭포가 보였어. 그리고 그 밑엔 샘이 있을 거고… 그 안엔 목욕하는 아씨가 있을 거고… 뒤의 고라니 새끼들은 비킬 기미도 없고… 강태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어. 더 다가갈 자신이 없었지. 하지만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심했어. 어떻게?
“죄송합니다! 아가씨의 옷이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믿기시지 않겠지만 제 뒤에 있는 고라니들이 목욕하는 아가씨의 옷을 물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바닥에 두면 물고 따라오고, 도망가려 하면 제 저고리를 물고 놔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가 옷을 들고 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훔친 것이 아니니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강태가 쩌렁쩌렁 소리치는 소리에 놀란 뻐꾸기들이 뻐꾹뻐꾹 울면서 날아갔어. 바닥에 무릎 꿇고 납작 엎드린 강태는 귀를 빨갛게 붉히고 눈을 꾹 감고 있었지.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어. 강태는 다시 몇 마디를 덧붙였어.
“저는 절대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모든 것을 걸고?”
“예, 예! 모든 것을 걸고!”
목소리를 들으니 여인이 틀림없었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에 강태는 숨을 헙 들이켰지. 곧 여인이 물에서 나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어. 꼼짝없이 색한으로 몰려 곤장을 맞고 시름시름 앓다 죽겠구나. 강녕하세요 어머니 아버지, 안녕 형. 모두 사랑해요… 하고 생각했다는데 지금 보니 나는 생각도 안 났나 보네? 우리가 본 세월이 얼만데… 그래도 정신없었을 테니까 내가 이해해 줘야겠지? 강태는 눈을 꼭 감고 여인의 심판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곧 사박사박 풀을 밟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오더니 강태의 머리 앞에서 뚝 멈췄지. 강태는 땅에서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들고 있던 옷을 제 앞의 아가씨를 향해 들었어.
“고라니 없는데?”
아가씨는 옷을 받지 않은 채 대답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아가씨의 말을 들은 강태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정말 방금 전까지 강태를 둘러싸고 있던 고라니 세 마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강태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고라니의 꽁지 하나 보이지 않았지.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제 앞의 매끈한 흰 두 다리에 빠르게 이마를 땅에 붙였어. 순식간에 옷을 훔친 변태 도둑에다가 거짓말쟁이까지 되어버린 거지.
“정말 믿어주십시오…”
“책임져.”
“돈으로 갚을까요? 보시다시피 제가 나무꾼이라 당장 큰돈은 없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되었든 꼭 갚겠습니다. 믿어주세요.”
“문가네 강태. 감나무 옆 초가집.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형은 한양에서 그림을 그리고. 맞지?”
“예. ……예? 그걸 어떻게…”
“나 책임져. 혼인하자.”
“예… 혼인…… 예? 혼인이오?”
“그래, 혼인. 책임진다며.”
강태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려다가 눈앞에 보이는 하얀 종아리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어. 제발 옷을 입어주십사 고개를 떨군 채로 옷을 든 두 손을 다시 위로 내밀었지. 다행히 여인이 옷을 받아들자 강태가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어. 스르륵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릴 동안 바닥에 꼭 붙어있던 강태는 마치 자기가 콩벌레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대.
“고개 들어 문강태.”
“예.”
“눈도 떠. 날 봐.”
고개는 들었지만 눈은 꼭 감고 있는 강태에 여자가 말했어. 천천히 눈을 뜨며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 강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어. 왜냐고? 강태는 머리털 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거든.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고 선녀님이라고 생각했대. 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물었더니 누구든 그때 그 여인을 봤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던데 난 아직도 잘 모르겠더라. 어쨌든 입술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고르는 강태를 향해 여자가 몸을 굽혀 강태와 눈높이를 맞췄어. 사르르 내려앉는 치맛자락이 마치 나비가 나풀나풀 춤추는 듯 가볍게 강태의 손등을 스쳤어. 강태가 바닥에 두었던 손을 거둬들이고 눈을 피하자 그 선녀님은 강태의 오른쪽 볼을 감싸며 강태와 눈을 맞췄지. 겨우 여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생긋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는 얼굴에 강태는 사르르 봄이 오는 것 같았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데, 더워서나 힘들어서 빠르게 뛸 때랑은 달랐다는 거야. 두근두근 심장이 떨려오는데 그 떨림이 종종 온갖 신기한 물건을 싸 들고 오는 보따리장수를 기다릴 때나 밤에 아버지가 들려주는 무서운 얘기를 들을 때의 두근거림과는 전혀 달랐대. 마치 뱃속에 나비 여댓마리가 날개를 파닥이는데, 그 날갯짓으로 생긴 바람이 꿀보다 달달한 향을 풍기면서 온몸을 넘실대는 기분이었다더라. 눈이 한 번 맞은 것 가지고 강태도 참 유난이다, 그치?
“네 새색시 고가 문영이야. 내 서방님이 된 걸 축하해. 나 서방님이 생겨서 너무 설렌다.”
강태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는 손길에 강태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엉거주춤 일어났어. 강태는 정신이 홀랑 빠진 상태였지. 문영? 이름도 참 예쁘다. 와중에 이름은 또 제대로 들은 강태였어. 일어나며 강태의 지게에서 나무들이 후두둑 떨어졌지만 다시 주울 정신도 없었지.
“새… 색시요…?”
“왜, 부끄러워? 얼른 하산해서 시댁 어르신께 인사드리러 가야지, 서방님.”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가 나무는커녕 색시를 얻어 돌아가다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여 강태는 제 볼만 꼬집었어. 당연히 아팠지.
“저기… 제 왼쪽 뺨좀 세게 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보고 내 서방님 뺨을 때리라고?”
문영은 강태의 뺨을 내려치는 것 대신 고 앵두같이 새초롬한 입술을 강태의 뺨에 쪽 소리 나게 붙였다가 떼었어. 귀싸대기를 맞는 것보다 강력한 한 방에 강태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지. 생생한 촉감은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어. 그렇게 문영의 손에 붙들려 한참을 걸어가는데 문득 지나가는 생각이 강태의 발을 붙잡았어. 혹시 문영이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올랐거든. 아무래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보다는 천년 먹은 구미호가 더 있을법한 일이잖아. 아니라고? 그래도 강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어. 초면에 강태에게 대뜸 친절하게 대하는 것부터, 아무도 혼인하고 싶지 않아 하던 자신과 혼인하겠다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 물론 강태는 동네 처자들이 자신을 두고 쟁쟁한 침묵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어. 점점 결론이 선녀에서 구미호 쪽으로 기울자 강태가 마음 굳게 먹고 발을 멈춰 제자리에서 우뚝 섰어. 강태의 팔짱을 꼭 끼고 걸어가던 문영은 강태가 멈추자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지. 문영이 팔짱을 낀 팔을 흔들어도 강태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어. 눈도 꼭 감은 것이 아무래도 문영과 눈을 마주치면 홀릴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 뭐,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어. 그 크고 반짝이는 눈을 보고 어느 누군들 안 홀리겠니? 당신의 간이 먹고 싶어요, 하면 그 누구라도 여기 마음껏 먹다 가세요, 하고 바칠만한 눈빛이었거든. 물론 이건 강태의 의견을 토대로 얘기하는 거야. 개인적으로 나는 잘 모르겠더라. 내 의견 안 궁금하다고? 너네 내가 얘기해 주는 거 듣고 싶긴 한 거야?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삐진다? 어쨌든 강태는 이제 문영이 완전히 구미호라고 믿는 듯했어.
“안 돼요!”
대뜸 멈춰서 눈을 꼭 감고 하는 소리가 ‘안 돼요’라니. 강태는 눈은 못 마주쳐도 반항할 용기는 있는 남자였어.
“무슨 소리야?”
“부모님은 안 돼… 그냥 이 자리에서 나를 먹어!”
“서방, 좀 알아듣게 말해봐.”
“네가 구미호인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여기서 희생할 테니 우리 부모님과 형은 살려줘!”
눈은 못 떠도 목소리만큼은 우렁차고 용맹하게 숲을 울리며 문영의 귓구멍에 쏙쏙 박혀들었어. 제자리에 우뚝 서서 나름 용감하게 소리쳐놓고 겁은 나는지 눈은 꼭 감은 강태를 문영이 귀여운 강아지 보듯 바라봤지. 귀여워. 효심도 지극하고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네. 보면 볼수록 탐나. 고작 나를 여우 새끼로 착각해서 벌벌 떠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귀여우니까 봐준다. 보나 마나 그 여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문영이 강태를 보며 입맛을 다셨어. 물론 강태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 못 봤지만 말이야. 문영은 여기서 잡아먹어달라는 강태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너른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지. 그 대신 아무 대답 없이 꼭 붙잡고 있던 강태의 팔뚝을 스르르 놓았어. 그리고 강태에게서 뒤돌고는 훌쩍훌쩍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지. 진짜 눈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태를 속이기엔 충분한 연기력이었어. 틀림없이 구미호라 생각해서 잡아먹힐 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팔짱이 스르르 풀리더니 곧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강태가 슬쩍 실눈을 떴어. 가녀린 뒤태가 더 애처로워 보여 강태의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아직 구미호라는 의심은 가시지 않았으니 쉽사리 다가갈 수가 없었지.
“…너무하네. 어찌 자기 색시에게 구미호라니… 나 책임진다 했잖아. 벌써 까먹은 거야?”
“아, 아니…”
“고라니가 내 옷을 물어다 줬다며 이상한 소리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냥 책임지기 싫으면 싫다고 해. 내가 싫다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어린아이가 서당에서 천자문을 읽는 소리가 문영의 눈물 연기보단 호소력이 있을 것 같았어. 근데 강태에겐 제대로 먹혔지. 옥구슬 같은 두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구미호는 무슨, 역시 선녀님이었나 봐. 이를 어째, 선녀님을 울려버렸어! 하는 강태의 생각이 다 들리는 듯했어.
“우, 울지 마세요…”
“그럼 나랑 혼인하는 거지?”
그래서 강태가 뭐라고 대답했게? 잠시만,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강태한테 물어봐야겠어. 문강태 너 그때 뭐라고 대답했어? 뭐라고? 너도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정신 차려보니 사모관대를 입고 문영과 합환주를 마시고 있었다고?
그렇대. 안 믿기겠지만 강태는 문영이랑 정말로 혼인했어. 사실 강태의 부모님도 혼인적령기를 넘어가고 있는 강태를 걱정하고 있었거든. 우리 아들 씻은 배추 줄기같이 멀끔하니 일도 잘하고 착한데 왜 아무도 혼인하자고 안 할까, 하고 고민했지. 물론 두 분도 여태까지 동네 처자들이 공익을 위해 강태네로 향했던 중매쟁이들을 몰래 처리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어. 그런데 강태가 문영이를 데리고 나타나자마자 이렇게 고운 아가씨를 만나고 있었는데 왜 진즉에 얘기를 안 했냐며 서둘러 혼인을 준비했지. 감나무집 강태가 혼인을 한대! 소문은 빠르게 입에서 입을 타고 옆 동네까지 흘러들어갔어. 소식이 처음 전해진 날 초상이라도 난 듯 밤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문강태가 알려나 모르겠네. 그 문강태의 색시가 누구일지 궁금했던 사람들은 옆 동네의 옆 동네에서까지 산을 건너와 혼인날 강태의 앞마당은 전쟁통 피난길처럼 북적북적했어. 담벼락으로 신랑신부 얼굴 한 번 보려고 기웃기웃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붙잡고 떠들기 바빴지. 어느 집 아가씨래? 고씨라는데? 우리 동네 고씨가 딸이 있었나? 박 씨가 그랬는데 강태가 나무하러 올라가서는 여자랑 내려왔대. 어메, 그럼 강태가 선녀와 나무꾼이라도 한 판 찍은겨? 이 사람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강태가 선녀 목욕하는 거나 훔쳐볼 앤가? 그건 아니제. 어? 신부 나온다! 문을 열고 나오는 문영을 보려고 다들 까치발에 고개를 빼서 마당이 아주 와글와글 시끄러웠지. 그런데 신부의 양 볼에 예쁘게 찍힌 연지 곤지가 보이자마자 거짓말처럼 동네가 싹 조용해졌어. 갑자기 조용해진 혼례장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지. ...왐마, 강태가 정말 선녀를 데려왔구만.
곧이어 등장한 사모관대를 입은 강태는 평소에 지게를 지고 산을 타던 모습이 싹 잊힐 정도로 멋있는 낭군님이었어. 역시 내 친구야.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한 도령 같은 강태에 마을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니까? 아주 천생연분이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고운 한 쌍은 처음 보네그려. 방금 둘이 눈 마주치고 웃는 거 봤어? 내가 다 간질간질 설레는구만. 자네는 다 늙어서 주책이야. 담벼락으로 고개를 쭉 빼고 혼례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감상을 덧붙였어. 날씨도 어찌나 맑고 쾌청한지 하늘도 둘을 축복하는 것 같았지.
그렇게 10년이 훌쩍 흘렀어. 스무 살 강태는 어느새 서른이 되어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었지. 아, 말을 안 한 게 있는데 둘은 결혼하고 분가했어. 문영이 집은 준비됐다며 강태 손 꼭 잡고 길을 안내했는데, 도착하자 보이는 어마어마한 기와집에 강태의 입이 쩍 벌어졌지. 나도 종종 놀러 가는데 정말 어마어마해. 그 크기도 엄청난데, 산 중턱에 그런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니까. 어쨌든 그 집에서 문영과 깨 볶으며 강태는 행복했어. 평소엔 나무를 하다가 종종 형도 놀러 오고 가끔 본가로 내려가면 예쁜 며느리 어서 오라며 문영을 반기는 부모님도 만나고 하나 부족함 없는 생활이었지. 여태 강태 얘기만 너무 했나? 내가 그놈 제일 친한 친구니 어쩔 수 없지. 내가 고문영에 대해 아는 걸 더 말해보자면… 아, 문영은 글을 썼어. 듣자 하니 책도 쓰고 시도 쓴다던데 나는 그쪽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잘 몰라. 나중에 강태한테나 너네가 직접 물어보든지. 강태가 그러는데, 호롱 불을 밝혀놓고 붓글씨를 쓰는 문영을 곁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걔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라더라. 그런 행복한 생활에서 강태가 딱 하나 마음에 걸렸던 점은 아직까지 문영의 부모님을 직접 찾아뵙지 못했다는 거였어. 문영 말로는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저 멀리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니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어느 날 난데없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등장한 문영이었지만 하늘에서 맺어준 것 마냥 잘 맞는 제 반쪽과의 하루가 강태는 매일 즐겁고 행복했어. 게다가 저를 꼭 닮은 아들과 문영을 꼭 닮은 딸은 어찌나 예쁜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았지. 나도 종종 가서 놀아주는데 삼촌 삼촌, 하면서 얼마나 애교도 잘 부리는지 너무 귀여워.
아, 이거는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이것까지만 들려주고 끝낼게. 나도 목 아프다. 그날도 시작은 강태의 별거 없는 평화로운 아침이었어. 나무를 하러 나가는 강태에게 조심히 다녀오시라며 도도도 달려와 배웅하는 아이들을 한 번씩 꼭 안아주고 문영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춘 강태는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했지. 이건 좀 딴 소린데, 사실 고문영이 어마어마한 부자니까 문강태한테 나무꾼은 그냥 취미나 다름없어. 나라면 그냥 하루 종일 놀고먹을 텐데 운동이라도 하겠다고 나무하러 나가는 게 난 이해가 안 된다니까? 몸 좋은 것들이 더 관리한다고 난리야. 하여튼 그날 평소보다 나무가 잘 베어져 금방 할당량을 채운 강태는 신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문영과 아이들을 깜짝 놀래켜줄 생각에 신났었대. 후다닥 지게를 마당 한 켠에 내려놓고 문영이 있을 방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니 창호문 너머로 아이들과 문영의 목소리가 들렸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던 강태가 살금살금 다가가 문에 귀를 갖다 대었어.
“어머니! 아버지랑 어떻게 혼인했어요?”
강태가 씨익 웃으며 문에 더 가까이 붙었어. 아들내미가 조잘대며 물어본 귀여운 질문에 문영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거든.
“음, 너희 아버지가 아주 옛날부터 맛있어 보여서 찜했지.”
“찜? 아버지를 찜했어요?”
“응. 원래 너희 할아버지를 잡아먹으려 했었는데, 너네 아버지가 더 맛있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어머니가 힘을 좀 썼어.”
“어떻게요?”
“고라니를 시켜서 사랑의 오작교 노릇을 하게 했단다.”
“우와, 어떻게 고라니를 시켰어요?”
“이 어머니가 산의 왕이니 못할 게 없지. 임금님이 할 수 없는 게 어딨어, 없지?”
“우와! 임금님! 어머니 멋있어요!”
“그럼 아버지가 왕비마마인가?”
“그렇지. 누굴 닮아 이리 똑똑해?”
이게 무슨 소리야. 문 너머로 들은 충격적인 진실에 문에 바짝 귀를 붙이고 있던 강태가 실수로 문을 툭 열어버렸어. 열린 문으로 강태가 보이자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와 강태의 목과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왔지. 일단 아이들의 등을 받쳐 마주 안아오는 강태였지만 여전히 얼이 나간 채였어. 순간 방에 앉아있는 문영의 등 뒤로 호랑이 꼬리가 살랑하고 보인 듯도 하니 첫 만남의 기억이 떠오르며 강태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 여보… 선녀도 아니고… 구미호도 아니고… 호랑이었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문영에 강태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어. 아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강태를 꼭 마주 안으며 어서 오라고 반기는 문영은 분명 강태가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이제 사실을 알게 된 강태가 어떻게 했겠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면서 짐 싸고 나갔을까? 그 문강태가? 강태는 문영을 꼭 껴안았어. 문영과 강태의 사이에 껴서 꼭 안긴 아이들은 숨 막힌다며 꺄르르 웃었지. 사람이 아니면 어떻고 호랑이면 뭐 어떻고 선녀면 뭐 어때. 이제 너무 사랑해서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됐을지는 너무 뻔하지? 아주 그냥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거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거래. 잘 됐지 뭐, 나는 아주 조금 심심해지긴 했지만. 잘 살아라 문강태! 잡아먹히지는 말고!